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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돌산대교~향일암 종주 트레킹 지도 및 개요

가자 안창섭 2010. 1. 22. 15:13

산행개요 

 

돌산도(突山島)는 우리나라 남단에 위치한 면적 71.61㎢의 도서로 과거 여천군 면적의 21%를 차지하여

위치상 남해안의 중심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 경상남도 남해를
두고 서쪽으로는 남면 일부와 화정면. 북쪽에는 돌산 대교에 의해 구 여수시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금오도와 외해인 남해 바다로 둘러 싸여 있다. 돌산읍의 4극은 동경 127˚ 48'인

임포 마을이 가장 동쪽에, 동경 127˚ 42'의 송도 마을이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또한 가장 남쪽은 복위 34˚ 35'에 위치한 성두 마을이고 극북은 북위 34˚ 44'에 위치한
진두 마을이다. 이러한 수리적 위치는 위도상 온대 계절층 기후 지역에 속하여 뚜렷한
4계절과 겨울에도 따뜻한 기온 분포를 나타내고 있으며, 경도상으로는 우리 나라 중앙
경선인 동경 121.5˚에 가깝다.

 ㅇ지리적 위치

돌산은서쪽의 가막만. 남쪽의 외해인 남해, 북쪽의 여수 반도를 바라보는 도서였지만
현재는 돌산대교로 여수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반도적 위치는 항구 발달에 유리하여
천혜의 어장을 형성할·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과거 공동 어장을 중심으로
한 연근해 어업과 최근 양식업의 증가는 돌산의 지리적 특정을 잘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방답첨사진(防踏僉使鎭)과 선소(船所)가
설치되었고 군사들의 생계를 위한 둔전(屯田)이 형성되었으며, 교통·통신 수단으로서 봉수는
한양까지 연결되는 직봉 가운데 채 5거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특히 군내리에는 방답진
선소의 굴강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주변 지역에서 훼손되어 버린 것과는 달리 역사적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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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십경으로 알려진 법정리 평사리에는 굴전, 계동, 월암, 도실, 평사, 모장마을이 속해있다.

굴전마을은 마을 남쪽의 산에 동굴이 있어 <굴앞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어 굴전(窟前)이란 한자로

표시하게 되었다. 여천군 시절에 편찬된 마을 유래지에는, 마을 앞 낫진개 뒷산에 동굴이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대미산에 있는 동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동쪽으로 작은 호수처럼 감싸 안은 <안굴전> 지역은 19만평의 공유수면이 전라남도지정

지방기념물 43호로 고니도래지이다. 겨울이면 찾아왔다가 떠나는 고니의 개체수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굴전마을 북쪽의 작은 마을 <진모>는, <무슬목>으로 이어지는 긴 목 모양의

 지형 때문에 진목으로 불렸으나 참나무가 많은 우두리의 진목(眞木) 마을과 구분되어 <진모>로 불려진다.

<무슬목>은 충무공의 전적지로 전해오는 곳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 가막만 바다 멀리서 보면 동서의

 바다가 이어져 보이는 지형적인 특성을 이용 왜군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60여척의 왜선과 300여명의

왜군을 섬멸하였다고 전해온다.

이 해가 무술년이어서 이 지역을 무술목이라고 했다는 설과 이러한 무서운 사건 때문에 무서운 목이라

 불렀던 말이 변하여 무술목이라 했다는 유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무슬목>은 본래 물과 물 사이 좁은 목이 있는 지형에 붙는 우리말 땅이름으로 전국의 여러 곳에서

무실목, 무시목 등으로도 불려오는 흔한 이름이지만 사건을 겪으면서 땅이름에 역사가 스몄다.

아름다운 몽돌 해변과 함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동백골>이라고도 하는 <무슬목>은 서쪽의

 포구가 둑으로 막혀있고 98년에 문을 연 전라남도 수산종합관이 자리를 하면서 동서 바다가 하나로

연결된 <무슬목>이란 땅이름의 의미를 간직한 지형의 특징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게 되어 아쉽다.

무슬목 남쪽으로 솟은 대미산에는 여수에서는 가장 훼손이 되지 않은 완벽한 형태의 산성과 봉수대가

전해온다. <대미산성>, <달암산성>, <월암산성>으로 산 이름이나 마을 이름으로 부르게 되어

그 이름도 많지만 산성에 오르면 펼쳐지는 탁 트인 전망이 가히 여수의 전망대라 할 만하다.

충무공과 임진왜란 관련 전설이 전해와 이순신 장군이 축성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역사학자들은 조선시대

이전의 성으로 이야기한다.

대미산 남동쪽에 자리한 계동마을의 옛 이름은 <줄-개>이다. 길게 이어진 포구의 형상에서 얻은

이름이었지만 <호박골>이란 마을 앞 골짜기가 호랑이가 엎드리고 있다는 뜻의 호복(虎伏)골로 표현되면서

 <줄-개>란 마을 이름은 ‘굶주린 개’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마을이름을 바꾸게 되었는데, 떠오르는 달이 아름다운 마을의 경치를 생각하여 계동(桂洞)

이라 이름 하였단다. 뼈와 함께 썰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인 ‘뼈꼬시’로 유명한 마을답게 넉넉한 인심을

 얹은 생선 횟집이 많은 마을이다.

 소의 머리를 닮아 ‘쇠머리’  돌산읍 우두리 
450미터의 돌산대교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돌산읍의 우두리 마을이다.
우두리에는 상동,

 하동, 백초, 진목, 세구지, 진두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택지로 개발된 세구지 앞

강남기미 지역이 가장 큰 마을로 변하였다.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진두(津頭) 마을은 <나룻고지>

라고 부르던 땅이름을 한자로 고쳐 진두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나룻배가 오가던

 나룻머리 동네였기 때문이다. 나룻고지 진두마을 동쪽으로 대형 조선소를 지나면 만나는 마을인

백초마을은 <신추>라고 부르던 마을 이름을 하얀 풀이 많은 동네로 해석하여 백초(白草)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뒷산으로 지천으로 깔려서 자라는 억새가 가을이면 하얀색으로 변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도 곁들여 전해왔다.  본래 신추라고 불렀던 많은 백초마을 들이 있다.

여수지역만 해도 화양과 돌산뿐 아니라 화정면이나 남면의 자그마한 섬까지 여러 곳의 신추라는 지역이

 전해오고 그 중에 일부는 백초마을이란 이름으로 전해온다. 이들 신추지역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는데 추가 심한지역이란 점이다.

추는 절벽이 있는 지형을 말하며 신추는 ‘힘이 세다’를 ‘심이 시다’라고 표현하는 사투리 말과 같이

심한 절벽이나 낭떠러지라는 뜻이었지만 백초라는 한자 옷을 입으면서 뜻까지 변하게 된 것이다.

백초마을 남동쪽의 진목마을도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적었다. 진목마을의 본래의 이름은

<참낭기미>라고 하였다. 마을 주변에 참나무가 많았기에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이를 참 진(眞)과

나무 목(木)으로 표기하여 진목마을이 되었다.

세구지 마을은 어느 지역 중간이란 뜻의 ‘새(사이)’와 장소를 의미하는 ‘-구지’가 합쳐진 땅이름

이었지만 한자로 세구지(世求地)로 표기하게 되니 세상을 구한다는 뜻이 되어서 가난을 면하게 한

부자동네라는 유래가 더해져서 전해왔다. 일제 강점기에 여수시내에 채소를 공급하던 대규모

 농장들을 일본인이 운영을 하면서 세구지의 유래는 더 위력을 발휘했다.

들판이 곧고 길게 벋어있어 이곳을 <진버들>이라 불렀고

요망소 아래 골짜기 <요망골>은 돌산에서 여수를 건너던 ‘사람들이 먼 길을 걸어와서 이곳에서

 얼굴을 씻고 요망을 내어 요망골이라 했다’ 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해왔다.

상하동(上下洞) 마을은 본래 <쇠머리>라고 부르던 마을로 우두리의 이름은

이 곳 쇠머리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은 땅이름이다.

쇠머리는 이 마을의 산의 형태가 소의 머리 모양이어서 쇠머리라 하였다고 전해왔는데,

일제는 쇠머리 마을의 이름자인 소가 힘이 세고 고집이 세어 이 마을의 주민도 일본정부에

 항의가 많고 힘이 센 장사가 많이 태어 날거라는 주민들의 믿음이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우두리(牛頭里)에서우두리(右斗里)로 바꿔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1995년 주민의 청원으로 마을이름은 본래의 글자를 찾았다.

상하동 마을 남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해변마을 <달밭기미>는 ‘달을 받는 해안’이란 의미와 걸맞게

해돋이의 명소로도 부상하는 곳이다. 본래 달맞이를 더 즐겨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일출의 명소보다는

월출의 명소를 많이 남겨놓았고 달맞이가 아름다운 달밭기미의 이름을 이 마을 해변에 남겨놓았다.

탑이 있던 <탑싼기미>, 따뜻한 <따순기미>, 호랑이가 있었다는 <범기미>의 이름이 함께 전해오는

 달밭기미로 가는 아름다운 언덕길에는 인생의 황혼을 보내시는 남산요양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다. 훈훈한 정을 담아 한번쯤 찾아뵙고 오는 길엔 아름다운 우두리 마을의 주변경관에도

흠뻑 젖어보길 권한다.
향일암과 군내리, 시내방면으로 나눠지는 삼거리에위치한 죽포리는

소라면의 대포, 삼일의 낙포와 함께 여수지역의 삼포로 불려오던 큰 항구가 있던 마을이었으며

방죽포에 방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마을 앞 조산까지 바닷물이들어왔다 전해온다.

죽포리의 본래의 이름은 큰 포구란 뜻으로 불렀던 <댓(大)개>였으나 이를 한자로 기록을 하면서

크다는 뜻의 대를 죽(竹)으로 표현하여 죽포(竹浦)가 되었다.

이후 방죽포에 방죽을 쌓아서 이 일대가 농토로 만들어지자 한자 포(浦)를 밭이란 뜻을 가진

포(圃)자로 고쳐 적으면서 지금의 죽포리(竹圃里)로 기록하게 되었다.

죽포리에는 동쪽의 두문포 마을과 남쪽의 방죽, 봉림마을과 함께 죽포마을이 행정리를 이루고 있는데

과거로부터 돌산의 중심에 위치한 마을답게 흥미 있는 역사가 의미 있는유적과 전설에 묻어서 전해온다.

죽포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정에는 성터가 세 곳이나 전해져 온다.

 본산성, 과녁성, 수죽성으로 부르고 있는 이 성들은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축성연대나

축조 목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같은 시기에 만들어져 왜구를 방어하는

공동방어의 역할을 했던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집터와 우물이 있고 오래된 도자기와 기와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성터 내부는 십 수년 전 까지도

마을의 소들에게 풀을 뜯기며 놀던, 초지이며 놀이터였지만 소 먹이던 어린아이들이 사라진 지금은

숲이 들어차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이 되었다.

마을에는 죽포 들을 만들면서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만들어졌다는 조산이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심어져 전해져 오고 1923년에 세워진 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운동장 모퉁이에는볼품없는 삼층석탑이

 마을 뒤 골짜기에서 옮겨져있는데 우리지역에선 유일한 옛석탑이다.

두문포 마을은 본래 <두뭇개>로 부르던 곳으로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마을 앞 포구의 모양 때문에

유래된 이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개 <둠개>가 변한 말이다. 두뭇개를 한자로 표기한 기록들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두모포(斗毛浦)로 기록하고 있고 이 후 기록들에는 두무포(杜武浦)포,

두문포(杜門浦)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 가까이의 과녁성, 본산성과 함께 마을 이름두문포의 해석을

 확대하여 백제시대의 돌산현의 치소로 이 마을을지목하던 경우도 있었지만 그 근거가 부족하다.

과녁성은 과녁을 설치하여 활을 쏘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 <과녁기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알려져

 오며 과녁기미에 성이 있어 <과녁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봉림리는 조선시대까지도 역기(驛基)동으로

 불려지던 곳으로 <역터골>이 본래 지명이다. 전설로는 고려시대 이 마을에 역참이 있어 <역터골>

이라 한다고 전해오지만 고려시대에 이 마을이 역원이었는지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았다.

다만 마을 주변으로 덮개 돌의 규모가 큰 오십 여기의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어

이 마을 일대가 고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방죽포 해수욕장이 위치한 방죽리는 150여 미터의 백사장에 맑은 물과 낚시를 함께 즐길수 있는

여건 때문에 여름뿐 아니라 연중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200년 이상 되는 수백 그루의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뿐 아니라 소나무 그늘과

바닷바람이 연출하는 여수 최고의 피서지로 알려진 곳이다.

 돌산읍의 가장 남쪽에 자리한 금성리는 작금과 성두마을로 이루어진다.

작금마을은 자갈기미가 줄어든 땅이름으로 해변이 자갈로 이루어져 불려진 이름으로

아직도 주민들의 입에는 <작기미>마을이다. 마을 북동쪽에 수십 기의 고인돌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다는 이야기와 그 터가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뒤늦게 배운 글로, 일본이 싫다는 글을 바위에 새겼던 마을청년 주재연은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의로운 죽음은 아직도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돌산읍의 남쪽 마지막 마을인 성두(城頭)마을은 <성머리>로 부르던 곳으로

목장성이 시작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두에서 신기마을까지 이어지는 성의 길이가 길어 만리성으로도 불렀던 이 성을 임진왜란 때

 군사용으로 축성된 성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전국의 목장을 그림으로 그렸던

그림지도에 목장성으로 그려져 전해온다.

 산에 오르기가 힘들다는 <댄 재꼴창>, 산 굽이가 쉰 두개나 된다는 <쉰두 굽이재>, <투구바구>,

 <망개산>, <분짓골> 등의 땅이름과 밤이면 남쪽바다 위로 바라보이는 노인성(老人星) 때문에 쉽게

 백세를 넘긴다는 장수마을로 알려져 온다.?

성두마을 동쪽 전망대 고개를 넘으면 임포와 소율, 대율마을로 이루어진 율림리이다.

해수욕장이 있는 방죽포 마을로부터 이어져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 율림리는 흰 자갈이 많아서

<흰개>로 불렀던 백포(白浦)와 바둑돌 크기의 자갈이 많았던 바돌개 기포(碁浦), 큰 밤개 대율(大栗),

작은밤개 소율(小栗)을 지나 향일암으로 유명한 임포에 다다른다.

임포마을은 옛 이름이 <깨개>인데 해변이 작아서인지 작은 <깻돌>이 많아서인지 분명치 않다.

옛 여천군의 마을유래지에서는 해안에 야생하는 들깨가 많아서 <깨개>라고 하였다는 재미있는

 해석을 하였는데 이는 임포마을(荏浦)의 한자를 들깨 임(荏)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임포마을 남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위로 향일암(向日庵)이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가 절을 지어 원통암이라 하였고

고려 광종 때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였으며 향일암이란 이름은 조선 숙종 때에

인묵대사가 지었다고 여수군지와 여산지(廬山志) 등에 전해온다.

높다란 바위위에 터를 잡아 암자를 지었기에 향일암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바위틈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석문들을 지나야한다. 더군다나 암자주변으로 바위위에 조각을 한 듯 한 자연이 만들어낸

거북무늬의 바위와 바다로 나아가려는 주변의 산세 때문에 영구암(靈龜庵)이란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뒷산인 금오산과 기암괴석과 절벽사이로 피는 동백과 아열대 식물로 이루어진 숲,

남해 수평선과 어우러진 해돋이의 아름다운 광경으로 여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어

역사적 가치와 주변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자료 40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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